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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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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금사면 주록리 산96-19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향토유적 제8호

최시형(1827~1898)은 고종대의 종교인으로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이다. 초명은 경상(慶翔)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해월(海月)이다. 경주 출신으로 최종수(崔宗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19세 때 밀양 손씨(密陽 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서 집강(執綱)으로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였다.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최제우(崔濟愚, 1824~1864)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도통을 승계 받았다. 최제우의 순교이후 동학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여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동학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여 1892년(고종 29)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청원하였으나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40여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 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그해 3월 보은(報恩)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1월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전라도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靑山)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 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하다가 1897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1)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하였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천덕봉(天德峰, 630m)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 형성한 주록리 소시랑골의 산 중턱에 최시형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사형집행 후 가매장된 시신을 이종훈(李鍾勳, 1855~1931) 등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묘역에는 최근에 설치한 상석, 고석, 향로석 등의 여러 석물이 갖추어져 있고, 봉분에는 원형의 호석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봉분의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묘비가 서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천도(天道) 제이세(第二世) 교조(敎祖)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始亨) 묘(墓)”라 하고 뒷면에는 이선근(李瑄根, 1905~1983)이 지은 비문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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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