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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실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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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인구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지역이고,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서 많은 자영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몰락하였기 때문에 해방후 여주 농민의 농지개혁에 대한 열망은 매우 컸다.

정부는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불하를 2대 경제시책으로 삼고 의욕적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북한이 토지개혁을 단행한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농민의 강렬한 토지소유 욕구를 해소하여 그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고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었다. 또한 이는 반봉건적인 한국의 경제 구조를 청산하고 농업을 근대화시키며, 지주의 수탈을 배제하고 국가의 조세 체계 속에 농민을 편입시킴으로써 신생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전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1948년 헌법에 명시된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농지개혁법안’을 작성하였다. 국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통과된 농지개혁법은 1가구당 3정보 이상의 자경(自耕)하지 않는 농지는 매수하고, 농지를 매수당한 지주에게는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고 보상하여 타산업으로의 전업을 알선한다는 등의 주요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평년작의 150%를 5년간 균분상환한다는 방침도 결정되었다1)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농림부는 농지개혁 시행에 앞서 농촌 실태조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에 시행된 농촌실태조사 결과 농지개혁으로 매수될 농지 면적은 전 농지의 29%에 해당하는 60만 1,949정보로 파악되었다2) 농림부는 실태조사에 근거하여 1950년 2월 매수 농지에 대한 필지별‘농지소표(農地小票)’3)와 농지소표의 내용을 분배 농가별로 모아 만든 ‘농가별 분배농지 일람표’를 동리별로 작성하도록 각 시도에 지시하였다. 농림부는 농민들이 이렇게 작성된 일람표를 3월 15일에서 24일까지 10일 동안 시·읍·면사무소에서 공람하도록 하였고, 이의가 없을 경우 분배농지를 확정하였다.

분배농지가 확정된 다음날인 1950년 3월 25일 농지개혁법 시행령이, 4월 18일 농지개혁법 시행규칙이 공포되었고 각 군의 읍·면장이 분배 예정 통지서를 경작자에게 발송하였다. 농림부는 1950년 6월 초순 시·군·읍·면사무소에 수배농가(受配農家) 단위로 작성된 상환 대장을 비치하도록 하고, 각 분배농가에게 상환증서를 교부하였다.4) 이에 따라 1950년 하곡(夏穀)부터 농지대가 상환곡(償還穀)이 납부되기 시작하였다.5)

농지개혁법에 의하면 3정보 이상의 자경(自耕)하지 않은 농지는 농지개혁 대상이었으나, 학교와 종교단체의 자경농지에는 예외가 인정되었다. 농지소유의 목적이 실습 혹은 해당기관의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주에서는 경성부(京城府) 정진동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재단법인 인창의숙(仁昌義塾)과 신륵사(神勒寺)가 그 조치의 대상이 되었다.6) 특히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과 정부 요로에 사찰 농지의 반환을 진정하였다. 결국 정부는 농지개혁 사무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7월 ‘사찰자경농지사정요령’을 제정하여 사찰 유지를 위해 필요한 농지를 반환하도록 조치하였다.7)  일제시기 30정보, 소작인 92명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농지개혁의 대상이었던 신륵사의 경우도 이 조치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농지개혁 사무는 중앙의 농지국이 담당하였고, 시군에서는 산업과 내에 농지계(1953년 4월 이후 지정계)가 신설되어 농지개혁 사무를 전담하였으며 읍·면에도 농지계가 신설되었다. 여주군의 경우 농림부 → 경기도 산업국 농지과 → 여주군 산업과 농지계 → 각 읍·면의 농지계가 농지개혁의 사무 라인이 되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여주의 농지개혁 사무는 잠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었다. 북한이 점령지역에서 실시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에 대한 부담과 군량미 확보의 필요성 때문에 정부가 수복지구의 사업 재개를 강력히 추진하였기 때문이다.8)  이렇게 하여 여주에서는 4,994정보의 농지가 농지개혁법에 의해 분배되었다.9)

농지대가는 현물 또는 현금으로 상환할 수 있도록 법에 명시되었으나, 상환곡은 현물로 징수되었다. 인플레이션을 막고 군량미를 확보한다는 이유였다. 상환곡은 시가의 50% 수준인 법정곡가로 환산되어 수납되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함께 농민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농민의 비난 여론이 거세어지자 국회에서는 농지개혁법 개정안을 내어 현금상환을 명시하고자 하였으나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10)

상환곡의 수납은 금융조합이 대행하였다. 여주의 상환곡 수납체계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각 읍면 농지계원들은 농민들에게 납입고지서를 발부하고 지정 장소에서 수납한 상환곡을 이포금융조합(梨浦金融組合)에 인도한다. 이포금융조합이 상환곡을 창고대행업자에게 보관케 한 후, 입고(入庫) 보고서를 작성하여 여주금융조합과 여주군에 제출하면 여주금융조합은 다시 이를 대한금융조합연합회(금련) 경기도 지부와 경기도에 보고한다. 이렇게 수납된 상환곡 대금은 경기도가 발급하는 이양곡물 확인증에 의거하여 금련 본부가 수납연도의 정부매입가격(법정곡가)에 의하여 매수농지분은 농림부 농지국, 귀속농지분은 귀속농지관리국의 구좌에 입금함으로써 정산된다.11)

원칙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수배농가(受配農家)는 총상환액을 5년간 균분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사유가 발생하여 평년작의 1/2 이상이 감수되었을 때는 상환기간이 연장되었다. 농지개혁 완료 예정연도인 1954년말 집계에 따르면 전국의 5년간 수납 실적은 71.8%였다. 전쟁으로 인해 1951년과 1952년의 수납 비율이 각각 52.7%와 38.1%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52년은 유례 없는 흉작이었다. 하지만 전후 상환율은 급격히 상승하였고, 1959년에 이르면 총상환량의 93.2%가 상환되었다. 1968년의 조사에 의하면 여주는 귀속농지 93.7%, 일반농지 100%의 상환 실적을 보이고 있다.12)

한편 농지를 매수당한 여주군의 지주는 보상신청서를 농지개혁법 시행령 공포일인 1950년 3월 25일부터 40일 이내에 경기도지사에게 제출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보상신청 지연과 전쟁 발발로 인하여 보상사무도 지지부진하였다. 농림부는 1950년 12월 2일 ‘보상사무 취급요령’을 내려 보상신청서 대신 지주신고서를 각 읍면에 제출하도록 하여 보상신청의 번거로움을 없애고 지주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였다.

보상신청이 완료된 후, 국가는 매수한 농지의 가격을 기입한 지가증권(地價證券)을 교부하였다. 지가증권에는 당해 농지 주생산물의 보상수량이 표시되어 있었고, 국가는 지주에게 지가증권에 명시된 자금을 매년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지주보상금은 제때에 지불되지 못하였다. 연간 400억이 넘는 지주보상금을 대거 방출할 경우 전시(戰時)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부가 지주보상금의 전액 방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13) 재무부는 매월 30만 원 한도의 지주보상금만을 지불하였다.14) 이렇게 되면 농민이 상환하는 상환곡과 지주에게 보상하는 보상금 사이에 시차가 발생하면서 차액이 남게 되는데 전쟁기간 중 재무부는 이 차액을 공무원 봉급과 전쟁 비용 등의 재정 자금에 충당하였다.15)

이렇게 되자 농지를 분배당하여 생활이 곤란하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헐값에 방매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지가증권으로 귀속기업체 불하 대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기업운영 능력과 자금동원 능력이 없던 중소지주들은 귀속기업체를 불하받는다고 하더라도 경영자금을 마련할 수 없어 다시 파는 경우가 많았다. 여주의 경우도 지주가 귀속기업체를 불하받은 사례는 없다.16)

지주세력은 농지개혁이 단행되면 국가의 알선을 통해 귀속기업체를 불하받아서 산업자본가로 전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주세력이 구상한 지주의 산업자본가화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귀속기업체 인수자(주로 우선권을 가진 연고권자)가 지가증권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7)  정부의 경제안정책에 의하여 지주와 농민 모두가 희생된 셈이다. 농지개혁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지주세력은 계급적으로 소멸하였다.

분배된 농지는 농민이 상환곡을 모두 납부한 후, 농지의 지번과 지목, 면적이 토지대장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지적측량과 등기수속을 마치면 농민에게 완전히 소유권이 이전된다. 농림부는 1951년 8월 31일 ‘분배농지 소유권이전 등기취급요령’18)을 제정하는 한편, 1953년 6월 12일 대한지적협회와 위탁계약을 맺어 지적측량작업을 시작하였다.19) 등기 취급 요령에 의하면 각 군·읍·면의 일선 농지계 직원들이 등기서류의 작성, 수속 등 등기 사무를 전담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등기사무는 전문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1955년 11월 20일 농림부는 한국사법서사협회와 위탁계약을 체결하여 등기사무를 추진하였다.20)

1950년 농지분배를 실시한 후 5년 간의 농지대가 법정상환기간이 끝난 다음해인 1955년부터 1959년까지는 분배농지의 지적측량과 등기이행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상환곡 수납이 93%에 달하는 1959년말이 되면 분배농지의 이전등기는 67%, 지적 측량은 97%의 진척을 보여 농지개혁은 완료 단계에 들어갔다. 1959년 11월말 현재 분배농지의 이전 등기는 전국 총 수배 농가 155만 호 중 65만 호가 완료되었는데, 미등기 농가 90만 호 중 50%인 45만 호가 농지를 전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의 경우는 총 수배농가 19만 369호 중 상환 완료 농가는 12만 8,518호, 상환완료 농가 중 등기완료 농가는 1만 7,661호로 타도에 비해 등기 실적이 낮은 편이다. 분배농가 중 미등기 농가는 17만 2,708호 그중 전매농가 호수는 7만 414호로 40.8%에 달하였다.

농지개혁법상으로 보면 전매한 분배 농지의 소유권 이전 등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등기 농가의 50%인 45만 호가 농지를 전매한 이유는 농촌의 극심한 사회적 변동(전쟁 피해, 좌우 대립)으로 농지를 방매하고 이농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소규모 농지를 분배받은 영세농가(零細農家)에 대한 국가적 지원(협동조합화, 영농기술 및 자금지원)이 미비한데다 1955년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대거 유입됨으로써 영세농가가 농업경영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관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실현하겠다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야심찬 정책이었다. 농지개혁으로써 농촌의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는 완전히 철폐되고, 지주계급은 소멸하였으며 국가와 농민의 일 대 일 관계가 정립됨으로써 정부는 조세운영(租稅運營)의 체계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농지개혁이 단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자립을 보장할 만한 영농개혁이 뒤따르지 않음으로써 농민들의 자립 기반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농촌은 이제 반봉건적 지배관계가 아니라 농공산물(農工産物)의 협상 가격차가 심화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소용돌이 속에 편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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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