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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성씨들의 통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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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원주(원성) 원씨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선대(先代) 계보 『원주원씨족보』를 보면 8세 원헌(元憲, 益興君)의 부인이 “원주(原州) 원씨(元氏) 천상(天常) 녀(女), 윤적(允迪) 손(孫)”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를 시조 원경(元鏡)으로 하는 『원주원씨세보』에 보면 원헌 부인의 조부는 18세 원윤적(元允迪)으로 나오며 이는 15세기 초경에 일어난 통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꾸로 후자의 족보에는 24세 원형연(元瑩然)은 1473년생으로 묘가 북내면 신접리 적지촌(赤芝村)에 있는데 그의 부인이 “원성(原城) 원씨(元氏) 증참판(贈參判) 중륙(仲稑) 녀(女) 신유생(辛酉生)”으로 나와 당시 서로간에 부계계통이 전혀 다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성공(陰城公) 10세 원효이(元孝而)의 아들인 원성 원씨 11세 원중륙(元仲稑)은 여흥 민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의 누이는 남양 홍씨 홍귀손(洪貴孫)에게 시집을 갔다. 남양 홍씨 예사공파(禮史公派) 중 사직공파(司直公派) 계보를 보면 사직공 13세 계연(季涓)의 아들이 14세 홍귀손이다.

남양 홍씨 음성공파의 계보를 더 살펴보면 17세 만석(萬石, 1622~1666)이 여흥 민씨 민회(閔晦)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그의 아들 18세 몽은(夢殷, 1656~1694)은 가평의 거족 연안 이씨 이명한(李明漢)의 손녀를 부인으로, 손자 19세 명직(命稷, 1683~1725)은 이웃 지평(현 양평)의 거족인 덕수 이씨 이여(李畬)의 딸을 부인으로 각각 맞이하여 대를 이어 부근 고을의 거족들과 혼맥을 이루었음이 확인된다. 남양 홍씨 사직공파 사직공 계연의 증손인 16세 덕연(德演, 1493~1553)의 부인은 용인 이씨이고 후에 대신면 계림리로 이묘(移墓)하였다. 문정공파(文貞公派)에서는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가 선조부마인 신익성(申翊聖)의 딸과 혼인하였다.

청주 한씨의 혼맥도 지역적으로 광범위하다. 문정공파(文靖公派) 중 사무파(士武派)인 18세 효윤(孝胤, 1536~1580)의 부인은 평산 신씨 신건(申健)의 딸로 그 인연인지 상촌 신흠(申欽)이 묘지를 찬하였다. 23세 종석(宗奭)은 부인으로 여흥 민씨 민종도(閔宗道)의 딸을 맞아들였다. 28세 계원(啓源, 1814~1882)은 남양 홍씨 홍영관(洪永觀)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31세 기홍(基弘)은 충청도에 거주하던 안동 권씨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의 후손 권경채(權景采)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청주 한씨 문정공파 중 삼등공파(三登公派) 후손인 19세 형길(亨吉, 1582~1644)의 부인은 해고(海皐) 연안 이씨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문정공파 중 사개파(士介派) 중에서는 20세 필원(必遠)이 덕수 이씨 이단하(李端夏)를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21세 여우(如愚, 1632~1682)의 부인은 남양 홍씨 홍중보(洪重普)의 딸이다.

(구)안동 김씨 문단공파(文端公派)의 16세 김전(金銓)은 원해익(元海益)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무송 윤씨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는 19세 택무(宅茂, 1771~1815)가 여흥 민씨 민진우(閔震佑)의 딸과 혼인하였다. 전주 이씨는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의 8세 이만재(李萬材)의 부인은 원주 원씨 안두추(安斗樞)의 딸이다.

창녕 조씨는 문충공파(文忠公派) 33세 조전주(曺殿周, 1640~1696)가 선조부마인 남양 홍씨 홍주원(洪柱元)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파평 윤씨 판도공파는 20세 계손(季孫, 1467~1534) 때 무송 윤씨 윤백연(尹伯涓)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처가와의 인연으로 여주로 입향하였다.

전주 유씨는 6세 숭조(崇祖,1452~1512)가 여흥 민씨 형손(亨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은진 송씨 송월재공파(松月齋公派) 14세 규징(奎徵)은 능성 구씨 구소(具熽)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상은 여러 통혼 사실 중 부분적인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이밖에도 각 성씨들이 지역내, 혹은 외에서 광범위하게 통혼관계를 맺은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당색에 따른 가름으로 일부 폐쇄적인 혼맥관계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학맥이나 서원출입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현상은 두드러지지 않다.

여주 거족들의 통혼에서는 왕실과의 혼인 사례를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다.

앞서의 원주(원성) 원씨 18세 몽린(夢麟, 1648~1674)은 효종(孝宗) 제5녀인 숙경공주(淑敬公主)와 혼인하여 흥평위(興平尉)가 되었고, 19세 이명직은 딸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버지인 경주 김씨 김한구(金漢耉)에게 시집보냈다.

안동 권씨 추밀공파 중 길창군파(吉昌君派)의 파조인 권규(權跬, 1393~1421)는 16세 권근(權近)의 3남인데 태종의 3녀 경안궁주(慶安宮主)와 혼인하여 길창위(吉昌尉)에 봉해졌다가 후에 길창군이 되었다.

무송 윤씨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공호공(恭胡公) 8세 사익(思翼, 1478~1563)의 아들 옥(玉, 1511~1584)은 막내딸(德嬪)을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에게 시집 보내 세자의 장인으로 공조참판을 지냈다.

황주 변씨 변광보(邊光輔, 1644~1662)는 소현세자 3녀인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97)와 혼인하여 황창부위(黃昌副尉)에 봉작되었다. 밀양 박씨의 경우는 고려 말기 문신인 박득중(朴得中)의 둘째아들 갱(쨨)이 정종(定宗)의 딸 함양옹주(咸陽翁主)와 혼인하여 밀령위(密寧尉)에 봉해졌다. (신)안동 김씨 충헌공파(忠獻公派)의 문근(汶根, 1801~1863)도 국구(國舅)로서 부원군(府院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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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