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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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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대의 문신이다. 생원이 된 후 1512년(중종 7)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80세가 지나 노직(老職)으로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1553년(명종 8) 10월 통정대부의 품계에 있을 때 정사(政事)의 잘잘못에 대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중종 대왕은 수신(修身)의 도는 잘하였으나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심복이 되어 교화를 이룰 수 있는 신하였는데 아첨하는 자의 망극한 참소를 듣고 먼 지역에 귀양 보내 사약(死藥)을 내렸고, 김안로는 탐욕스럽고 더러운 자인데 도리어 그를 등용하여 삼공을 삼아 후세에 수치를 끼쳤습니다” 하였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묘가 산북면 백자리에 있었으나 최근에 타지(他地)로 이장하였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 『명종실록』,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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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